철야

진짜잡설 2008/07/24 01:51 posted by Surplus Text
이틀 밤을 새우니까 정신이 없다. 눈은 따갑고, 하품은 연신 나오며, 누우면 잔다. 낮과 밤이 뒤바뀌어서 밝은 날에 잠을 잔다. 세미나가 내일인데 손에 텍스트가 잡히질 않는다. 읽고 있던 책들도 바닥에 던져놓았다. 혼미한 상태가 좀 나아지려면 이번 주는 지나야 한다. 살고 있다는 게 이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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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탕티즘

진짜잡설 2008/07/20 00:31 posted by Surplus Text

딜레탕티즘 :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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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책들을 얼마 전에 죄다 정리했다. 정리하는 데 꽤 힘이 들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기에는 책꽂이의 칸 구분이 모자란 반면 책꽂이의 칸 넓이는 항상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잡스럽게 책을 읽지만, 막상 그 잡스러운 것을 탄탄하게 읽지는 않았다. 나름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을 정한 지도 벌써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전공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닥 많지 않다. 지금도 나와 같은 전공을 선택하고 싶어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후배들에게 어떤 책을 추천해줘야 할 지 모르겠다. 기껏해야 얇은 에세이집, 시평집이거나 아예 두꺼운 철학서 말고는 내가 읽고 베던 책이 없다. 정리를 다 해 놓고 보니 '대체 나는 그 동안 뭐했나?' 싶어서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여튼 인상이 험상궂은 한 선배가 나에게 '시시껄렁한 책 말고 원전을 읽어라' 하며 핀잔을 줬었다. 나도 학문이라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을 지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이게 취미가 되어도 좀 탄탄하게 기초를 갖춰 놓는게 좋지 싶어서 원전을 찾아서 깨작깨작 읽었다. 그런데 원전이라는 게 쉽게 읽히는 것도 아니고, 두께가 얇은 것도 아니어서 하나를 잡고 읽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잡식성은 그러한 인내를 좀체로 견디질 못했고, 두꺼운 책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가지치기' 식의 책읽기 습관 때문에 집중을 잘 못했다. 그러다보니, 쉽게 잘 읽히면서도 여러 주제에 대해 발을 걸쳐놓는 시평들은 잘 읽었지만, 그런 시평들을 끌어안고 있는 두꺼운 책들은 결국 앞쪽만 까맣고 뒤쪽은 하얗게 되었다.

그런 잡식성을 정당화해주는 게, 내 전공이 가지고 있는 부박한 뿌리였다. 교수들도 몰래 학부생들에게 토로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철학과 단절하고 계량과 수학에서 시작해버린 이 100년짜리 짧은 전공은 항상 수학하는 사람들에게 불안과 꺼림칙함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나처럼 쓸데없이 철학책이다 뒤적거리는 걸 낙으로 아는 '구시대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물론 이 관계의 학문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에, 내가 이 전공을 때려 치울 일은 없을 것이니 어떻게든 지금을 정당화해야 했다. 한 교수의 말은 그 정당화를 가능케 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학부생에게 이 '뿌리 없음'을 시인하면서, 이 '뿌리 없음'이 창조성의 기초가 된다고, 즉 어디에다 붙여 놓아도 잘 적용이 되고,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내 잡식성은 그런 '창조성'이라는 말에 쉽게 스스로 정당화 되었고, 그게 낳은 결과가 지금이다. 어느새 학문은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 하나의 자극을 위해서 '취미'의 대상이 된 듯 하다. 그나마 그 취미의 기초는 탄탄하지 못했다.

아마추어적인 정보들이 파편처럼 내 머리에 박혀 있고, 그 파편들을 만들어 낸 잡식성은 요즘 돌아가는 세상 꼴에 시시콜콜 발언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낳았다. 뭘 하나 깊게 파면서, 그거에만 딱 할말을 하는 식의 마인드를 가지는 게 아니라, 어지간한 사안에 한 마디씩 던지면서 뭔가 사안을 아우르는 잡지식의 총체를 만들어보자는 되도 않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툭툭 내뱉는 말의 근거들에 대한 전문성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항상 발언은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없으면서도, 전문 지식이 왔다 갔다 하는 사안들에 대해서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이 몸에 배어버렸다. 이런 모순 때문인지,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실제로 손에 잡히는 건 잘 없는 불안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말의 깊이가 깊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서, 종종 우울해진다.

자콥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티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취미로 하는 그림은 예술계에서 크게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평생을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 한정된 분야만을 숙달하더라도 이른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개요를 정리하고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어쨌든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적으로 야만인에 불과하다.(<소유와 자유>, 14쪽)(이현우, 딜레탕티슴에 대하여)

전체에 대한 조망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특정한 분야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마추어적인 딜레탕티즘을 가져야 한다는 게 부르크하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문제는 나는 이 부르크하르트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하나의 전공이라도 알지 못하고 이리 저리 부박하게 떠다니고 있기에, 전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다. 강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몸으로는 알고 있는 듯 한데, 머리로도 알고 있는 듯 한데, 전체로서의 내가 모르는 듯 하다. 습관에서부터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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